페르난도 사바테르의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윤리학을 읽고

[ENG]

정  재  민

  페르난도 사바테르는 그의 저서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윤리학’에서 윤리학이란 ‘윤리가 무엇인지 토론을 시작하게 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윤리”라는 학문(學文)에 있어서 정답(正答)이란 것은 없으며, 무한한 연구와 토론을 통한 의견 교환을 매개로 조금씩 더 이해를 넓혀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사바테르는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결국 반박불가의 절대적인 진리란 윤리학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학자나 학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개진시키고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더욱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다수의 생각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인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며, 그러하기 때문에, 오직 합의체를 통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결정하고 약속하고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사베테르의 주장의 일부분을 깊이 있게 파헤쳐보고, 합리적인 반박을 해보고자 한다.

  사베테르의 저서의 내용 중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로왔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부분은 아무래도 “자유와 선택”에 대해서 서술된 1장과 2장이었다. 사바테르는 “‘자유’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이며, 명령, 관습, 그리고 개인의 기분에 흔들려서 결정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라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선택은 거의 없다. 예를 들자면, 나는 일찍부터 전문직 즉, 변호사 혹은 의사 등의 직업군이 이상적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직업군을 가지기 위해서는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여야 하며, 대한민국에서 학업에 매진한다는 것은 수많은 과목을 배우고 그 내용을 오지선다형으로 꼬아놓은 문제를 맞추기 위해서 세세한 내용까지 외워제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상적인 직업군을 가지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을 감내하지만 이것은 진정 나의 ‘선택’인가? 아니다. 내가 자라온 사회가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의 직업군을 신봉하고, 고연봉을 주며, 계급사회를 형성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으며, 실제로 의사나 변호사로서의 능력이나 잠재력을 측정하는 것과 무관한 수능시험이라는 수험이 도입된 것 또한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즉, 내가 생각하는 방법도, 살아가야 하는 방법도 나의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논리적 무리가 있는 것이다. 군 입대를 무조건적으로 해야하는 것도 “나”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받은 ‘명령’이며, 이를 ‘관습’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받아들이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 또한 사실을 그대로 직시함으로서 오는 내재적인 불쾌함이지 결코 나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란 명령, 관습, 기분의 영원한 노예이고, 이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우리가 신과 대비되는 개념의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인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베테르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부자유 속에 자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명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한다고 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윤리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를 이해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Q정전의 아Q가 하루하루 고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정신승리”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쉽게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아Q는 중국 작가 노신(魯迅, 루쉰)이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는 몽둥이찜질을 당해도 “나는 아들놈에게 맞은 격이다” 라고 외치며 육체적으로는 처참하게 부수어졌건만, 오직 정신적으로 본인이 더 뛰어나므로 사실상 승리했다고 선언하는 정신승리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자기합리화의 끝에 아Q는 “이건 내가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었구나” 그리고 “물질적인 세계는 나의 생각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구나”를 깨달으며 끝내 자살을 선택한다. 사베테르는 이러한 행태를 과연 어떤 의미에서 옳다고 판단한 것일까? 개개인 정신 건강에 좋다고 여긴 것일까? 하지만 아Q 역시 끝내는 현실을 꺠닫고 자살을 택하게 된다. 나의 선택이 아닌 것을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며 생활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라고 보이기보다는 또 하나의 “선택”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형태가 다수에게서 나타난다면, 그 사회는 조금 더 신뢰와 상호존중이 갖추어진 안정적인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결정했다고 믿는 사항들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자신의 결정이고 선택이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윤리적이라고 사베테르는 주장한 것일까? 전체주의적인 시점에서의 실효는 정말 “윤리”적인 것과 동의어인 것일까?

  혹자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었다: 사베테르의 주장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며, 명백한 자기 위로 행위일 뿐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사람에게는 자신이 실제로는 자유 (自有) 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경우, 이를 망각할 수 있는 선택이 주어질 뿐이다. 이것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지성이 없는 존재들은 이 선택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위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것을 망각하기를 거부하는 진실을 쫓는 자들은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참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 소크라테스가 되느냐 행복한 장님돼지가 되느냐의 차이가 바로 이것에 있다고 그는 주장했었다. 이러한 현실 어디에 “윤리”가 개입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한 처참한 현실을 잊을 수 있게끔 해주는 아름다운 순간순간들이 간혹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며, 새로운 생명을 두 손에 안아보는 순간이며, 재앙 한 가운데에서 동료를 구해내는 순간이며,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과 상봉하는 순간 등이다. 이러한 짧지만 강렬한 순간순간들 때문에 우리는 잠시 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별도, 사별도, 재앙의 도래도 결코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아주 잠깐동안 말이다.

  설령 사베테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선택 아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오늘날 논란이 되는 “흙수저” 혹은 “금수저”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자. 그들은 자신들이 결정하지 않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인정하고 그 환경이 제시한 한계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즉,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가? 누가 그들을 이처럼 처참한 계급 사회 속으로 끌어들였단 말인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그리고 흙수저이면 가난한 대로, 금수저이면 잘 사는 대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과연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사베테르는 강자의 논리를 대변한 궤변가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가 기득권층 사람들의 힘을 유지시키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라는, 만족하고 감사하라는,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리를 탄생시킨 것처럼, 사베테르의 가르침은 오늘날 기득권자들의 부를 유지시키기 위한 독사의 혀와도 같은 거대악이라 말하는 데 나는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사베테르의 삶의 태도에는 동의하지만, 그의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삶에는 수많은 상황이, 특히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이, 사람이, 시간이,  장소가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에 대해 단순히 무력해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는 이것이 윤리적인 선택이라서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 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돼지보다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을 택하는 것도 용기이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것 또한 용기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의 명을 받은 것은 명을 받은 것이다. 이는 바뀌지 않는 사실이자, 현실이다. 우리는 이 명을 따르던, 따르지 않던 그것이 옳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러한 선택을 할 것이다. 사베테르는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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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은 JS & Associates 의 청소년 인턴 에디터로 2015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위 글은 연세언더우드국제법학회나 JS & Associates의 공식적인 입장과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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